현대 기업의 '용어 인플레이션'은 지독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전략가라 부르지만, 실상은 개발자 눈치를 보며 스토리보드를 파편화해 던져주는 '에이전트'에 불과하다. 부서 내 비주류로 밀려나 뒷담화의 대상이 되고, 5번의 진급 누락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내가 부족했던 것은 기획력이 아니라 그 비겁한 '동의'를 거부할 정치력과 사회성이었다. 실장의 권위 앞에 싫다고 말하지 못한 대가는, 내가 기획한 서비스가 아닌 남이 만든 티켓의 숫자나 세고 있는 고립된 30대의 초상이다.

그때 싫다고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 더 빨리 울타리 밖으로 쫓겨났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직업적 자존감까지 실장의 입맛대로 '동의' 처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쥐고 있는 기획자라는 타이틀은 실체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며, 그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영혼 없는 알겠다를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진짜 기획자가 아닌 '티켓 관리인'으로 박제된다. 9년의 시간 동안 내가 쌓은 것은 경력이 아니라, 부당한 요구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지워온 거대한 포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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