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싫다고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 더 빨리 울타리 밖으로 쫓겨났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직업적 자존감까지 실장의 입맛대로 '동의' 처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쥐고 있는 기획자라는 타이틀은 실체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며, 그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영혼 없는 알겠다를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진짜 기획자가 아닌 '티켓 관리인'으로 박제된다. 9년의 시간 동안 내가 쌓은 것은 경력이 아니라, 부당한 요구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지워온 거대한 포기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