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길드의 장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엑셀 다운로드 버튼 위치 옮기기'에 혼쭐 나던 21세기 표준 계약직 노동일 뿐이다.
스승은 "간단하지?"를 외치며, 제자는 그 한 마디에 평생 버전 번호 매기기를 배운다.
이건 도제 아니라, '도태'다.
그리고 그 도태가 낳은 결정체가 바로 '자가증식 스토리보드'다.
하나의 기능이 v1, v2, v3…으로 무성하게 번식하는 광경은 마치 집 안에 풀어놓은 오리털 베개를 보는 것 같다.
한순간 날리면 끝이 없고, 결국 아무도 누가 먼저 터뜨렸는지 기억 못 한다.
"이전 파일과 비교해서 봐주세요"는 기획자가 할 말이 아니라, 고고학자나 발굴 현장에서나 나올 법한 탄원이다.
"이거 우리가 4년 전에 쓰던 그릇 맞아?" 하고 물으면 유적지가 따로 없다.
버전이 많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만큼 처음부터 머릿속이 빈 깡통이었다는 고백이다.
버전 관리는 '발전의 흔적'이 아니라 '못 망치고 온몸에 붕대 감은 자동차'다.
할 때마다 새 파일을 파는 건, 설계도 없이 집 지으며 "어제 벽 허물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또 지어볼까?" 하는 식이다.
이건 애자일이 아니라, '애둘급'이다.
"린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나태"라고 고백하는 문장이 제일 빛난다.
린은 '쓰레기를 작게 만들어 빨리 버리자'는 거지, '작게 만든 쓰레기를 200개로 나눠 숨기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더미 위에 개발자가 "욕 먹는 건 우리 쪽"이라고 한숨 쉬는 장면은, 마치 누군가 떡볶이 먹고 매운 건 기획자 탓이라고 우는 꼴이다.
기획 부채는 개발 부채보다 사악하다.
코드는 리팩터링하면 되지만, 기획서는 리포장하면 또 v4가 되니까.
결국 이 사회는 '기획엑셀 다운로드 버튼 추가'라는 공식을 10년째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도제식으로 전통을 계승해요"라고 한다.
전통이라고 하기엔 너무 쪽팔리지 않았나.
중세 장인이라면 학습비용이라도 받았을 텐데, 21세기 도제는 유급도 아닌 '경력'이라는 이름으로 임금도 안 주고 배움의 댓가를 스스로 월급 깎아 먹는 구조다.
요컨대, 도제식 기획은 '배움'이 아니라 '배뭄'이다.
버튼 위치 하나 배우려고 프로젝트 전체를 잃어버리는, 그야말로 '하나 배우고 열 잃기'의 극치.
그러니까 스토리보드가 자가증식하는 건 당연하다.
머릿속이 텅 비었으니, 파일로 채워야 하지.
그래서 기억하라.
도제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먼저 "이 일이 왜 필요한지"를 물어라.
그걸 모른 채 v1, v2, v3를 찍어내는 건 기획이 아니라 '장난감 조립 설명서' 찍어내기다.
그리고 그 종이 더미가 쌓일수록 당신의 경력은 '브라우저 히스토리'에 머물고, 평판은 ctrlz도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