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비극과 내면의 요새 현대인의 생존 지침서

출근은 언제나 무대에 오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무대는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하고, 그 가혹함은 종종 실력의 부재가 아닌, 실력을 가장한 연극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사무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감각을 잠시 접어두고,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착용한다. 이 가면은 단순히 표정을 숨기는 것을 넘어, 논리적인 척, 프로페셔널한 척, 심지어 괜찮은 척까지 요구하는 정교한 연기 지침을 포함한다. 이는 가식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이자,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윤리의 한 형태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일상생활을 전면 무대(front stage)와 후면 무대(back stage)로 나누어 설명했듯, 우리는 끊임없이 이 두 공간을 오가며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이들이 후면 무대 없이 전면 무대만을 강요받는다는 데서 시작된다.

동료와 클라이언트는 우리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관객이 아니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적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특정 '기능(function)'을 수행하여 '결과(result)'를 도출하는 명확한 장면이다. 따라서 감정을 숨기는 행위는 거짓말이라기보다, 월급이라는 대가를 지불받는 이의 계약서에 명시된 불문율에 가깝다. 아를리 호크실드가 정의한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한다. 임금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고 표정이나 태도를 연출하는 일, 그것이 바로 현대 직장인의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비극의 서막이다. 출근이 공연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현대의 기업은 공연의 '내용'보다 '자막'에, 즉 본질보다 형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기술과 기획의 영역에서는 '용어 인플레이션'이 기본 옵션처럼 따라붙는다. 어제는 '화면 정의서'였던 것이 오늘은 'PRD(Product Requirements Document)'가 되고, 단순한 기획 문서는 'Product Narrative'로 둔갑하며, 흔한 회의는 '싱크(sync)'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일단 영어로 바꾸기만 하면 뭔가 더 고급스럽고, 심지어는 더 유능해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급스러움이 과연 고객 가치로 직결되는가?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용어는 무성하게 늘어나지만, 실제 제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그 사이 책임은 더욱 모호해진다.

나는 중간 규모의 회사에서 2년을 버텼고, 이어서 중견기업 계열사에서 6년을 더 버텼다. 도합 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은, 회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유능함' 그 자체가 아니라, 유능해 보이는 '연출'과 그 연출을 든든히 지지해 줄 '아군'의 숫자라는 것이었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5년 연속 진급 누락이라는 쓰디쓴 현실로 다가왔다. 실력이 부족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절반은 맞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정치력과 사회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시스템 안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보다, '편'이 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낙인찍혔다.

기획자는 산출물로 말한다는 환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산출물은 '신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나는 파편화된 스토리보드로 신뢰를 잃어본 경험이 있으며, '이메이전트(Imagination) 기획'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로 책임을 희석하는 문화를 옆에서 목격했다. "이건 컨셉이에요", "디테일은 개발하면서 맞춰요", "일단 방향성만 잡죠"와 같은 말들이 쌓이면 결과는 언제나 동일했다. 일정은 터지고, 화면은 뒤집히며, 결국 모든 비난의 화살은 기획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획자의 문서를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읽히지 않는 문서는 곧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때부터 개발자에게 휘둘리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건 기술적으로 어려워요"라는 한마디에 기획의 절반이 증발하고, "그럼 이렇게 타협하죠"라는 말이 합리적인 척 가장하며 제품을 망가뜨렸다. 물론 개발자가 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제품의 중심에서 조율 실패의 책임자로 서서히 밀려났다는 데 있었다. 부서 안에서는 비주류가 되었고, 다른 기획자들 사이에서는 뒷담화와 따돌림의 소재가 되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꼿꼿해?'가 아니라, '저 사람은 왜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해?'가 되는 순간, 무대 위에서 나는 배우가 아니라 단순한 소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회사는 내게 '리더십', '오너십(ownership)', '임팩트(impact)'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러나 권한은 없는데 오너십을 내놓으라 하고, 결정권은 위에 있는데 임팩트를 내놓으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최고의 회사어는 바로 '얼라인(alignment)'이었다. 얼라인은 본래 좋은 단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대하지 말고 그냥 맞춰'라는 명령을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용어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나 역시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블로그, 유튜브, 개인 브랜딩 등, 요즘 시대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말에 나름대로 시도해 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꾸준함이 실력이라고들 하지만, 꾸준함을 유지할 체력은 회사가 이미 갈아먹은 지 오래였다. 조회수는 나의 자존심을 갉아먹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만 남기고 싶지 않아서 더 말을 아꼈다. 결국 남는 것은 한 문장이었다. "현실의 한계 상실감."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 시장에서도 검증받지 못하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부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뼈아픈 깨달음이었다.

연봉 4,500만 원. 중견기업이라는 얇은 울타리. 밖에서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고립 그 자체였다. 퇴사 버튼을 누르기에는 애매하게 현실적이고, 그렇다고 버티기에는 너무나 모욕적인 상태. 딱 그 중간, 사람들이 가장 오래도록 썩어가는 온도에서 나는 8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출근은 공연이라는 문장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웃어라'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울지 말라는 것도, 감정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무대 위에서 해야 할 연기는, 회사가 좋아하는 공허한 용어가 아니라, 고객이 실제로 체감하는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할수록, 진짜 실력은 더 촌스럽고 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법이다. 누구나 PRD를 쓰지만, 아무나 '결정 가능한 문서'를 만들지는 못한다. 누구나 데이터 드리븐을 외치지만, 아무나 다음 액션을 명확히 못 박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무대 뒤에서 우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우는 순간, 관객은 감동하지 않는다. 그저 '프로답지 못하다'는 차가운 판결만 남을 뿐이다. 고프먼의 비유처럼 전면 무대는 관객을 설득하는 공간이고, 후면 무대는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문제는 많은 직장인이 후면 무대 없이 전면 무대만을 강요받는다는 점이고, 그때 사람은 결국 내면의 평화를 잃고 표정부터 망가지는 것이다.

삶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부당한 비난과 모욕에 직면한다. 현대인의 일상은 마치 거친 파도와 같아서, 예측 불가능한 비난과 도발이 수시로 밀려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고대 인도의 한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 구역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그 수행자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한 친척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라문 악구사(, Insulter) 바랏바자가 격분하여 수행자를 찾아왔다. 그는 수행자에게 거칠고 모욕적인 말로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바랏바자의 모욕적인 말이 끝나자, 수행자는 그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의 친구나 동료, 친척들이 때때로 그대의 집에 손님으로 찾아오는가?"
바랏바자가 대답했다. "네, 스승 고타마시여, 때때로 친구나 동료, 친척들이 제게 손님으로 찾아옵니다."
수행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들에게 음식과 진미를 대접하는가?"
"네, 때때로 그들에게 음식과 진미를 대접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바랏바자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만약 그들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스승 고타마시여, 그 음식은 모두 저의 것이 됩니다."

수행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를 모욕했지만 나는 그 모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비난했지만 나는 그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저주했지만 나는 그 저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내게 던진 모든 것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바라문이여. 그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수행자는 이어서 설명했다. "누군가 모욕하는 자에게 모욕을 되돌려주고, 비난하는 자에게 비난을 되돌려주며,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되돌려준다면, 그들은 서로 '함께 먹고, 함께 어울리는' 관계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와 함께 먹지도, 그대의 무리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바랏바자는 놀라며 말했다. "왕과 그의 신하들도 스승 고타마를 '성자'라고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스승 고타마는 여전히 화를 내시는가?"
그러자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설했다.
"성냄 없는 이에게 어디에 성냄이 있으랴,
길들여지고, 조화롭게 살며,
바른 앎으로 해탈한 이에게,
고요하고 그러한 이에게.
그대가 화내는 이에게 맞서 불같이 화를 내면,
그대는 일을 더욱 악화시킨다.
화내는 이에게 불같이 화내지 않는 이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이긴다.
상대가 격분한 것을 알고서도
마음 챙겨 고요히 머무르면,
그대는 자신과 타인, 양쪽의 선을 위해 사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 양쪽을 치유하는 이치를 행할 때,
그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듣고 바랏바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수행자의 가르침이 마치 넘어진 것을 바로 세우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며, 길 잃은 자에게 길을 보여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밝혀 눈 있는 자가 형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고 찬탄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행자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이 고대 이야기는 현대 직장인의 삶에 깊고 신랄한 통찰을 제공한다. 무대 위에서 감정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생존 기술이라면, 내면의 요새를 구축하고 외부의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영혼의 생존 기술이다.

이제 우리는 현대 직장인의 무대 위 삶과 고대 수행자의 내면 요새를 교차시켜, 현실과 지혜의 접점을 탐구할 때다. 무대 위에서 연기해야 하는 직장인의 숙명은 변하지 않지만, 그 연기의 질과 그로 인한 내면의 소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다.

첫째, '감정노동'의 재해석이다. 현대 직장인은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고 연출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시달린다. 이는 마치 음식과 진미를 대접하는 행위와 같다. 우리는 회사의 요구에 따라,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때로는 원치 않는 미소를 짓고, 억지로 공감하는 척하며, 불합리한 지시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제공하는' 감정 서비스다. 그러나 고대 수행자의 지혜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 즉 내면으로 침투하는 부정적인 감정적 오물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상사의 불합리한 질책, 동료의 비아냥거림, 고객의 무례함은 마치 바랏바자가 퍼부었던 모욕과 같다. 우리가 그것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분노하고 상처받는 순간, 우리는 그 모욕을 '수락'하게 되고,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함께 어울리는' 꼴이 된다.

감정노동을 통해 우리는 외부적으로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직무의 일부이자 계약 조건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표현과 내면적인 수용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미소를 짓고 논리적인 척할 수 있지만, 동시에 내면에서는 그 외부적 요구가 자신의 본질을 침범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수행자가 바랏바자의 모욕을 듣고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했듯, 우리는 직장 내의 독소적인 감정이나 불합리한 상황을 내면화하지 않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의 내면을 오염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둘째, '용어 인플레이션'과 '공허한 지시'에 대한 대응이다. 현대 기업은 'PRD', 'Product Narrative', '싱크', '얼라인'과 같은 공허한 용어와 실체 없는 지시로 가득하다. 이러한 용어들은 때때로 실질적인 가치 창출을 방해하고,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며, 직원들의 지적 능력을 모욕하는 형태로 작용한다. "일단 방향성만 잡죠", "이건 컨셉이에요"와 같은 말들은 결국 '일정은 터지고, 화면은 뒤집히며, 기획이 욕받이가 되는' 현실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허한 말들은 바랏바자의 모욕과 다를 바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전문성을 훼손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다. 수행자는 모욕을 받지 않음으로써 그 모욕을 보낸 자에게 돌려주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공허한 용어와 지시를 내면화하여 좌절하거나 무기력해지는 대신, 그것들이 가진 실체 없음을 인지하고, 그것이 나의 본질적인 가치나 업무 태도를 훼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결정 가능한 문서'와 '다음 액션을 못 박는' 구체적인 실력으로 대응함으로써, 공허한 말들이 가진 힘을 무력화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불필요한 노이즈를 걸러내는 지혜로운 행위다.

셋째, '조직 내 정치'와 '아군'의 문제다. 직장 생활은 종종 '유능함'보다 '유능해 보이는 연출'과 '아군'의 숫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정치의 장이 된다. 진급 누락의 원인이 실력 부족뿐 아니라 '정치력과 사회성의 부족'에 있었다는 고백은 많은 직장인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비주류가 되고, 뒷담화의 소재가 되며, 결국 '소품'으로 전락하는 경험은 현대 직장인이 겪는 고통의 핵심이다.

고대 수행자는 모욕하는 자와 '함께 먹고, 함께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했다. 이 원칙은 직장 내 정치에 대한 현명한 태도를 제시한다. 조직 내에서 '편'을 가르고 '아군'을 늘리는 행위는 때로는 불가피해 보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역학에 깊이 몰입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소모하고, 분노와 비난의 순환에 갇히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흐름을 인지하고 최소한의 생존 전략을 취하되, 그 정치적 싸움에 내면의 평화를 걸지 않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불필요한 파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명확한 가치와 실질적인 기여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의 요새를 지키면서도 조직 내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에너지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거리 두기다.

넷째, '권한 없는 책임'과 '오너십'의 역설이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리더십', '오너십', '임팩트'를 요구하지만, 정작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나 결정권은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빈손으로 전쟁터에 나가 승리하라는 명령과 같다. 이러한 상황은 직장인에게 깊은 무력감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수행자가 "화내는 이에게 불같이 화내지 않는 이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이긴다"고 설했듯,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에 대한 내면의 반응을 통제함으로써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권한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내면까지 무력해질 필요는 없다. 진정한 오너십은 외부에 주어진 권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 그리고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통제하는 내면의 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대한의 가치를 창출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불합리한 요구를 내면화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임팩트'와 '오너십'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다섯째, '현실의 한계 상실감'과 '중간 지점의 고통'이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에서도 시장 검증을 받지 못하며, '퇴사하기에는 애매하고, 버티기에는 모욕적인' 중간 지점에 갇힌 직장인들의 고통은 심연과 같다. 개인 브랜딩이나 외부 활동을 통해 탈출구를 찾으려 해도, 회사에 의해 소진된 체력과 자존심은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다.

고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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